- 보도 : 2016.10.12 08:30
- 수정 : 2016.10.12 08:30
왜 해외시장인가(1)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까지만해도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만들어내어 중국과 일본 등에 내보내던 나라였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반가사유상, 이 세상의 어느 문자보다도 더 많은 소리를 쓸 수 있는 한글, 고려인삼, 거북선...
그렇게 멋들어진 문화를 만들어내다가 갑자기 세계의 후진국이 된 것은 한반도 이외의 세계에 문을 걸어 잠근 단 몇 년 때문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고난의 세월을 겪었고, 다시 세계로 나감으로서 그 고난을 이겨냈다.
왜 이 시점에서 해외 시장인가?
사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명료하다.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살 방도가 없다. 한국 경제에서 해외시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어려울 때마다 해외시장에 수출을 하면서 위기를 돌파해왔다.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과정이 언제나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해왔다. 그 때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시장을 열어가며 해외 시장에 진출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발전하여왔지만 이제는 다르다. 세월이 변하고 세상이 변함에 따라 우리에게 주는 해외 시장의 의미는 당연히 변해야 하고, 거기에 맞추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 우리에게 해외 시장은 먹고 살거리를 찾기 위하여 진출해야 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에게 해외 시장은 우리의 존재를 찾기 위하여 진출해야 하는 곳이다. 미래 우리에게 해외 시장은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진출하지 않으면 않되는 곳이 될 것이다.
과거의 해외시장은 먹고 살거리 찾기위해 진출한 곳
일제가 한민족의 발전 가능성을 짓밟던 36년이 끝나자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0여년의 어려움은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떨어뜨려 놓았다.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고 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GNP는 67달러였다.
외국에 팔 자원은 없고 사람만 득실거렸다.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그저 사람의 몸을 이용한 '일'밖에 없었다. 땅은 좁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려면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게 그게 한반도내에서는 나올 거리가 없었다.
공장을 만들려고 해도 자본이 없어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했고, 물건을 만들려고 해도 외국에서 자원을 수입해야 했다. 또 나라가 작다보니 아무리 공장을 잘 돌려도 한국 내에서 소비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다볼 수 있는 길이라고는 수출뿐이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 공장을 세우고, 남녀 없이 배가 고파 어디든지 일을 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온몸을 불사르던 공돌이 공순이들이 밤낮없이 일을 해서 물건을 만들어내 세계에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저임금에 노동집약적 산업이 한국의 산업이었다.
경제개발이 막 시작된 1960년 주요 수출품은 합판, 가발, 철광석 등이었다. 1968년 합판의 수출액은 6800만 달러로 당시 전체 수출액의 10%가 넘는 명실상부한 제1의 수출품이었다. 가발도 마찬가지로 초기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수출품이었다.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영화산업이 발전하며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게 우리에게 기회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 사람이 가게를 열었다면 십중팔구는 가발가게였고, 심지어는 유학생들도 가발장사로 학비를 벌었다. 이어 1970년대에는 금성사(LG전자)가 처음으로 A-501이라는 국산 라디오와 국산 흑백TV를 개발하여 전자 강국으로서의 가능성을 열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인의 섬세한 손재주를 바탕으로 한 섬유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1973년 수출 10억달러를 이루는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70년대까지만 해도 물불가리지 않고 많이만 수출하면 장땡인 줄 알았다. 그렇게 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까지 해외시장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먹여 살린 기간이었고,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끼니를 위하여 해외 시장을 두드려야만 했다.
현재의 해외시장은 우리의 존재를 찾기위해 진출해야 할 곳
1980년 이후는 우리가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한 기간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산업 중심이 노동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낮은 경공업에서 기술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반도체·PC·휴대전화 등 우리를 세계 경제의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린 주력 수출품들이 이 때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반도체 신화'의 주역은 단연 삼성전자이다. 삼성전자가 1983년 세계 3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64K D램(DRAM)은 손톱만한 크기의 칩 속에 6만4천개의 트랜지스터 등 15만개의 소자를 집적한 최초의 상용화 반도체로, 한국이 이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계기가 됐다.
기계공업의 꽃으로 불리는 자동차 역시 1980년대이후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현대자동차가 1976년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수출하며 시작하여 1986년 출시한 엑셀은 1987년에 미국 시장에서만 26만대가 판매되어 미국 수입소형차 시장에서 판매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국산 1호 휴대전화인 삼성 SH-100은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춰 첫선을 보인 뒤 전 세계에 1천만대 이상 판매되며 주력 수출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남의 돈을 무작정 받아들여 남의 이름으로 수출하는 방식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사상적으로는 매판자본론, 종속이론, 민족자본론 등의 나타나며 해외 시장과의 지나친 의존을 경계하며 내부적 역량을 키우려고 노력한 시기이다. 특히 1980년대 초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던 신발의 주요 생산기지가 한국의 부산에서 중국이나 태국 등으로 넘어가며 부산의 경기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자기 이름으로 하는 장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각의 과정을 통해서 한국은 고도 산업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완제품에서 부품과 소재로, 단순가공·조립에서 IT와 하이테크 제품으로 산업구조가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끈질기고도 온 힘을 다 기울인 노력으로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맞으면서도 경제와 산업 전반의 구조 조정을 통해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정보통신 등 현대 경제를 이끄는 주요 제조업 분야서 최선두 그룹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지난 100년간 발현되지 못했던 한민족의 문화적 기운은 한류문화로 세계를 향해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가난하고 억눌린 민족성이 아니라 밝고 활기차고 문화적인 존재였음을 되찾고, 남의 이름이 아닌 우리 이름으로 물건을 해외 시장에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역 1조달러를 이루었다.
홍재화 필맥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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