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간결하고 쉽게 써야합니다
반 컵의 물이 있습니다.
반이 비었다고 보시나요? 반이 찼다고 보시나요?
분명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도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눈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실과 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있습니다. 저는 그 컵이 반이 찼고 나머지를 왜 그리고 어떻게 더 채워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이해할 수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글은 길지 않고 주제를 벗어나지 않게 충분한 근거를 대면서 쉽게 써야 합니다.
얼마 전에 최창환이 쓴 ‘남자 50, 다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읽었습니다. 50대 중반의 남자가 친구의 문상에 가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픈 문상에 가서도 어느 덧 고등학교 친구들과 현실을 이야기하며 박장대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버거워합니다. 남의 뼈를 깎는 고통보다 자기 손톱 밑의 아픔을 더 절실해 하지요. 그러니 아무리 돌려놓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조금만 길어도 다시 자기 삶속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오래 전에 친구 아버님의 문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과 같이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꽤 똑똑하다는 친구였지요. 그 친구와 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처음에는 건성으로 고개를 꺼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이야기인지 아주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데 잘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술은 마시는 둥 마는 둥하며 그 친구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저는 ‘왜 내가 이 친구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지? 내가 너무 어리석은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갑자기 화가 확 치솟았습니다. 술 처먹고 이리저리 헷 소리하는 것을 무려 30분이나 신경을 곤두세우며 들은 것입니다. 도무지 말하는 바를 모르겠고, 친구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세상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정치이야기를 하면서 초점이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니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술주사가 있는 녀석이었습니다. 무지하게 신경질이 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신경을 써서 그런지 골치가 띵했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소설이야 좀 주제에서 벗어나도 됩니다. 어쩌면 소설은 주제만큼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즐거움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결론이 없으니까요. ‘감성을 중시하는 문학적 작가’가 아닌 ‘논리를 가지고 써야 하는 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주제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약간 소금치는 정도는 되어도 그 소금 때문에 글의 맛이 변해서는 곤란하지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쓸 때 우선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웁니다.
충분한 근거를 갖추되 길게 설명하지 말자
근거를 갖추는 가장 쉬운 일은 이전에 일어났던 유사한 사례이지요.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 데 또 일어났네! 그러니 이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라고 주장할 수있지요. 이런 사례를 많이 드는 사람으로 미국의 저자인 ‘제리미 러프킨’을 들 수있습니다. 그가 쓴 책은 꽤 많습니다.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한계비용 제로사회’등 많은 책을 지었지요. 그가 쓴 책을 읽어보시면 이렇게 사례로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보통의 책들은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하여 사례를 넣는 데, 제러미 러프킨은 사례를 넣어가면서 사이사이 자기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도 이해못할 대목이 없습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일어난 사실’보다는 ‘왜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지?’가 더 중요할 수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의 불쌍한 대통령들은 존경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훌륭하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대통령에 대한 판단이 아주 다르지요. 저자가 아무리 객관적이 사실을 대고 이야기해도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지를 설명할 수있어야 합니다. 저는 보통 내가 이야기할 때 독자가 반박을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며 두 단계까지는 생각하고 씁니다.
한 문장이 A4용지로 썼을 때 두 줄이상 넘어가지 않게 쓰자
글을 쓸 때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일 중의 하나가 ‘나는 무엇 무엇을 하려고 한다’라고 쓸려고 했는 데 막상 쓰고 보니 ‘나는 이것 저것으로 되어있다’라고 하는 식의 글이 되버립니다. 일단 주어와 주어의 행동이 맞지 않아요. 게다가 현재형으로 시작했다가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 끝납니다. ‘나는 한다’라고 해야하는 데 ‘나는 하게 됨을 당한다’라고 써져 있기도 합니다. 쓰는 사람도 글이 길면 헷갈려서 앞뒤가 다르게 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읽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길면 앞 뒤가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런 글을 읽고 나면 멍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뭐를 읽었지?’ 하게 되고요. 그래서 가급적 한 문장이 두 줄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한 호흡에 한 문장을 읽을 수 있는 게 좋습니다. 약간 길다 싶으면 쉼표도 자주 씁니다.
한 꼭지에서 두 주제를 다루지 말자
다행히도 저는 박학다식하지 않아서 하나의 주제를 한 꼭지를 쓰는 데만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데 한 꼭지에 이 주제, 저 주제를 마구 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도대체 주제가 뭐야? 쓰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게 뭐야?’라는 혼란스러움이 옵니다. 일단 제목을 정하면 그냥 제목에 맞는 내용만 넣습니다. 그럼 머리 속이 가지런히 정리됩니다. 한 번에 머리 속 밭 고랑을 하나만 갈면 되니까요.
결론부터 알려주고 쓰기 시작하자
결론부터 쓰면 글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제를 미리 이야기해주면 흥미가 더 생길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추리소설이라면 결론부터 쓰지 않지요. 아주 가끔은 범인부터 나오고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을 설명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런데 저는 소설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결론부터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지를 풀어가는 편입니다. 그럼 좋은 것이 일단 내가 글을 쓰는 게 편합니다.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 결론을 쓰면서 확 정해지거든요. 읽는 사람들도 앞 길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고 터널 끝을 보며 운전하는 것처럼 편하게 읽을 수있지요.
개념을 설명할 때 될수록이면 한두 단어로 정의하자. 문장으로 하지 말자
‘홍재화 : 책쓰는 무역회사 사장’
‘홍재화는 말이에요 어쩌고 저쩌고 주저리 주저리 뭐라 뭐라 ~~하는 사람이에요’
어느 쪽이 더 머리 속에 확 떠오르나요? 아무래도 한두단어로 설명한 쪽이 상상하기 쉽겠지요. 글을 쓰다보면 내가 만든 새로운 생각, 개념을 설명해야 할 때가 많이 생깁니다. 그걸 여러 문장으로 길게 설명하면 개념에 대한 정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뭐하면 뭐!’ 딱 나와야 개념이고 그에 대한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글 잘쓰고 말 잘하는 사람은 그런 걸 잘합니다. 남들은 머릿속에서 흐미하게 떠오르는 데 말 잘하는 사람이 탁 나와서 ‘아 그건 이거에요!’라고 확 말하면 사람들은 무릎을 치면서 ‘그려 맞어~, 맞는 말이여!’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한 두 단어로 뭔가를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단어도 많이 알아야 하고, 또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와 중복된 의미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의 지적 능력은 그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단어의 숫자와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빅뱅’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태초의 기원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어휘력을 늘리려면 많이 읽어야 합니다. 평소에 많이 읽어야 어휘력이 늘고, 단어의 활용력이 늘어납니다. 사전을 통째로 씹어 드시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좋은 내 글을 쓰려면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어 잘 모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