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8일 목요일

독서로의 자유를 향하여

독서로의 자유를 향하여.....


이제는 독서로의 자유를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자유롭게 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결혼의 역사는 길지만 연애의 역사는 짧고, 연애결혼의 역사는 극히 최근인 것을 아시나요?
우리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자유는 언제부터였을까요?
‘독서 금지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우리는
 ‘독서로부터의 자유’도 구했다.
  이제 ‘독서로의 자유’를 추구할 때이다.

옛날에는 아무나 책을 읽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옛날 미국에서는 노예가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교수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런 때도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아무 책이나 누구나 읽고 싶을 때 읽을 수있습니다. 하지만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너무 많은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기 위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가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읽는 책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지요. 게다가 요즘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정보와 재미를 추구할 수있기에 별로 책을 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도 별로 불편함이 없지요. 이제 억지로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책을 읽고 글을 써야할 이유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말로 하던 것도 글로해야 하고, 얼굴보며 하던 사교도 이제는 글로 해야 하는 시대거든요. 이제는 내가 읽은 책을 글로 표현해야 하는 데, 또 재미가 있어야 남들과 친해질 수있습니다. 남들을 재미있게 하려면 내가 먼저 재미를 즐겨야 하지요. 이제야 말로 진정한 ‘독서로의 자유’를 즐길 때입니다. 그 자유를 만끽하며 즐길 때 재미를 느끼고 그 좋은 느낌을 남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독서로의 자유를 만끽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겁니다. 남들이 좋다, 이 책을 읽어서 반드시 무언가를 도움이 되는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와 같은 목적성에서 벗어나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겁니다.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목적성이 있는 행위들은 그 것이 이루어지거나, 그 목적이 소멸하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자, 여러 분은 지금 책방에 있다고 상상을 해봅니다. 그 안에서는 수 만권의 책들이 있습니다. 그냥 돌아다니다가 마음이 내키는 곳에 서보세요. 종교분야인가요? 소설분야인가요? 아니면 시문학? 아니면 자기계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마음의 위안? 심심풀이 땅콩? 분노억제를 위한 안정제? 아니면 파리채? 책은 생각보다 써먹을 만한 용도가 많습니다. 성공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고, 재미를 얻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책을 어느 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면 책의 용도가 제한됩니다. 책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독서는 무지하게 따분해질 수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에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학 교과서 책읽기처럼 따분한 일도 없지요. 하지만 수학 책이라고 다 따분한 것만은 아닙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같은 책은 수학 책이지만 재미있습니다.




위의 식은 많이 본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입니다.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변의 길이는 대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 그런데 이게 제곱이 아니라 세제곱의 경우는 달라집니다.




제곱일 때는 분명히 증명이 되는 데 세제곱일 때는 어떨까요?
증명이 된다, 안된다 수학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지요. 그런데 수학자도 아닌 변호사인 페르마가 1637년 “임의의 세제곱수는 다른 두 세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고, 임의의 네 제곱수 역시 다른 두 네제곱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3 이상의 지수를 가진 정수는 이와 동일한 지수를 가진 다른 두 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경이로운 방법으로 증명하였으나, 책의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옮기지는 않는다" 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별거 아닌 문제인데 귀찮아서 이 정도로 끝낸다고 하고 말아 버린거지요. 이 말이 맞는 지 틀리는 지를 두고 수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400년을 끌었습니다. 파울 프리드리히 볼프스켈이라는 수학자가 이 문제를 증명하는 사람에게 현상금 10만 마르크를 걸었지만 1995년에야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존 와일스 경(Sir Andrew John Wiles)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 과정이 무지하게 흥미진진합니다. 한 번 읽어보시죠.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잘 모르는 부분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세요. 저도 다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이처럼 편견을 버리고 그냥 느낌으로 고른 책중에 실패하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목적으로부터 우선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와 동떨어진 독서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목구멍하고 관련된 책만 읽어도 금방 지칩니다. 항상 밥만 먹는 게 아니듯이, 항상 필요에 의한 책만 읽을 수는 없지요. 활이나 미사일이 날아가는 동영상을 보신 적이 있나요? 똑바로 날아가는 것같지만 흔들거리며 술취한 사람이 갈지자 걷듯이 날아갑니다. 그래도 오차범위내에서 움직이니 결국은 표적을 맞추지요. 우리는 독서를 목적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요. 그게 지나치면 사람이 지칩니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해야합니다. 다이어트에서 요요현상이 오는 것은 몸무게만 강조하다보니 굶고 뛰고 하면서 그 몸무게를 만들고 나면 나태해져서 마구 먹지요.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된 목적은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게 아니듯이 독서도 경제.경영서, 자기 계발서만 읽으면 재미가 없거든요. 책도 자기 느낌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느낌을 따라서 고르다보면 때로는 재미를 위하여, 때로는 지금을 위하여, 때로는 미래를 위하여 책을 고르게 됩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내가 내 능력대로 그 책을 해석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 그게 보다 적극적이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책읽기를 즐기는 독서로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환경상 ‘독서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 듯이 보이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 분은 ‘진정한 독서로의 자유’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그림은 알베르토 밍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나온 그림으로, 1940년 런던이 독일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한 어느 서점의 풍경입니다. 지붕과 벽은 무너져 바깥의 유령같은 건물들이 보이고, 가게의 중앙 대들보와 가구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지만, 서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서가 앞에 세 사람이 참으로 암담한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하면서 너무도 이상하게 닥쳐온 현실을 폐허 한 가운데서도 독서를 통하여 이해를 구하려는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비추어 보아도 실감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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